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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별세

by 정보채굴단 2024. 4. 18.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별세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별세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별세

2024년 4월 18일, 우리는 한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을 잃었습니다.

홍세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로 잘 알려진 저자이자 장발장은행의 창립자 겸 은행장이 77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서울 중랑구의 녹색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난 홍 은행장의 삶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과 영감을 주었습니다.

 

망명 생활로 시작된 특별한 여정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금속공학과에 입학했으나 자퇴한 뒤 같은 대학 외교학과로 재입학한 홍세화는 민주수호선언문 사건으로 제적되는 등 평탄치 않은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은 그를 더욱 강인하게 만들었고, 그의 삶은 더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유럽의 무역회사에 근무하던 중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프랑스 파리로 망명한 홍세화는 택시 운전과 관광객 안내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힘든 시기를 견뎌냈습니다.

이 시기는 그에게 단순한 생존을 넘어,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톨레랑스의 메시지

1995년, 홍세화는 자신의 망명 생활과 성찰의 결실을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자전적 에세이로 출간합니다.

이 책에서 그는 '톨레랑스'(관용)라는 개념을 통해 한국 사회의 변화와 성찰을 촉구했습니다. 당시 한국 사회에 던진 그의 메시지는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한국으로의 귀환과 장발장은행 설립

2002년 완전히 귀국한 홍세화는 한겨레신문 편집국 기획위원,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으로 활동하며 저술과 논평을 이어갔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항상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들에게 있었습니다.

 

2015년, 그는 '장발장은행'을 설립하여 현대판 장발장들에게 이자 없는 대출을 지원함으로써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했습니다. 이는 그가 평생 강조해온 톨레랑스의 실천적 표현이었습니다.

 

유산과 기억

홍세화의 별세는 많은 이들에게 큰 슬픔을 주었지만, 그의 삶과 저작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귀중한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가 남긴 '톨레랑스'의 메시지는 현재와 미래 세대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홍세화의 삶은 우리에게 개인의 용기와 사회에 대한 깊은 사랑이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깊은 영감을 주며, 그의 유산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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